공부란 무엇인가?

2021. 10. 25. 02:24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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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에 어른들은 나에게
큰 감동을 주지 못했다.
왜 내가 매일 학교에 가야하고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가 없었고
시험문제에 왜 그들이 말하는 것만이
답이여야 하는지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깊이 고찰해라기 보다는
무조건적인 반항심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공부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은
내가 결핍을 느낄 때 처음으로 가져봤던 생각이다.

당시 인문학 열풍이 불어
고전을 읽으면 임계점에 도달하고
구름에 뜬 기분을 만끽하며
머리가 터져 만물에 접속되고
곧 나는 천재가 된다는 이론이 내 안에
꿈처럼 자리잡았다.
그렇게 되면 나의 결핍을 채워주리라
지적으로 물질적으로~

아.. 그러나
잘못 읽은 것인지?
덜 읽은 것인지?
도무지 하늘엔 먹구름 뿐이다.


만남을 가지는 배움

하지만 독서를 하며 얻게 된 즐거움은 만남이다.
책 안에 작가와 캐릭터와의 만남
서로 다른 책의 주인공들의 만남..
나와 타인과의 만남
또 나 자신과의 만남이다.

공자께서는 7편 25에서 이러한
만남을 기대하셨다.

성인을 내가 만나볼 수 없다면,
군자라도 만나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선한 사람을 만나볼 수 없다면,
한결같은 사람이라도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다.
없으면서도 있는 체하고,
비었으면서도 가득 찬 체하며,
곤궁하면서도 부유한 체를 하는 세상이니,
한결 같은 마음을 지니고 살기도 어려운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생명을 사랑하는 배움

무엇이 되기 위한 공부인가?
무엇을 하기 위한 공부인가?

결핍은 수치심으로 진화된것인지
아니면 변형된것인지 도리어 같은 것인지
요즘의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키워드였다.
사람을 쓸모로 평가하고,
능력치를 재어보는 악한 기준이
다시 나를 죄책감으로 몰아 넣었다.
이러한 기준들은 나를 온통 화나게 하고
타인을 향해 나 자신을 향한 분노로
들어나기가 일쑤였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으며
둘째 아들 이반이 막내 동생 알료사에게 들려주는
반역 예수님의 서사시를 읽으며 알게 된 것이다.
예수님과 대심문관의 장면에서
사람들은 대심문관에게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대심문관은 그들을 축복한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 후에
위대한 정신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실 때
자유의 이름으로 돌을 떡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럼으로 인간은 반역자가 되어
깃발을 들고 예수께 나아와 반역자가 되었다.
결국 인간은 위대한 정신에게 자유를 놓고
노예가 되어 먹여 살려 달라고
애원하게 되었다는 결론이다.

절벽에서 뛰어내려라.
인간은 두려움 앞에 기적을 바랐지만
예수님은 믿음으로 그곳에 계셨다

세번째 기회도 거절한 예수님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
카이사르의 검을 거부한다.

나에게 이 대목은 쓸모로
인간을 평가하거나 능력치로
줄세우는 일에 대해 빛을 비추어주었다.

생명의 존귀와 신비가 회복되어
존재 자체 만으로도 소중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생명에 대한 경의로움이 다시 해석되어졌다.
공부의 의미와 목적이 여기서부터 출발할 때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제대로 알지 못함을 걱정해여한다는
공자의 말씀처럼 이를 실천한는 대목은
젊은이들은 집에 들어가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나가서는 어른들을 공경하며,
말과 행동을 삼가하고,
신의를 지키며,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사람과 가까이 지내야한다.
이렇게 행하고서 남은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글을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제가 하고 싶은 공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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