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멍거

2021. 11. 10. 15:26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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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ie MunGer


씀씀이를 절제하고 단출하게 사는 것 그게 비결이다.
버는 것 보다 적게 쓰고 투자하는 것.

1929년 대공항
미국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겪은
찰스 토마스 멍거를 소개합니다.

그는 단지 경제적 독립을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반세기 후 역사상
가장 큰 기업 왕국을 세우게 된다.

찰리 멍거는 워런버핏의
소형 가치 투자 펀드에 합류하게 된다.
워런버핏과 찰리 멍거는
파트너가 된지도 벌써 60년이 되었다.

찰리멍거와 워렌버핏


워렌버핏과 찰리 멍거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S&P500에
금융업종 중에서 시가총액이 가장 큰
기업은 버크셔해서웨이다.
찰리 멍거는 버크셔해서웨이에 부회장이며
워렌버핏과 함께 거대한 금융 지주사를
운영하는 인물이다.

‘자본주의의 축제’ 라고 불리는
워렌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은 워런버핏과 찰리 멍거에게 집중된다.
투자와 인생에 대한 재치 넘치는 입담을
들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대공항으로 단단해지다.

Forged by the Great Depression

1924년찰리 멍거는 워렌버핏의 고향인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서부 사람들은 방락벽과 모험정신이 있었다.
이런 특징들은 세대를 거처 내려오게 된다.

찰리 멍거는 격변의 20년대에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연방 판사였고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였다.
멍거는 돈을 벌기 위해서는 가치의 교환이
필요함을 어릴 때부터 이해했다.
그는 햄스터를 키워서 거래를 시작한다.
행복했던 어린시절은 대공항 앞에 무너지고 만다.

대공항으로 인해 가족들은 먹고 살기 위해
어린 멍거를 포함에 모두 일을 해야했다.
찰리 멍거는 버핏의 가족이 운영하는
슈퍼에서 일을 시작한다.
2달러를 벌기 위해 하루 12시간을 일해야 했다
멍거는 이 시기에 근면성이 강해지고
돈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된다.

대공한 시절 가족들은 금본위제를 신봉하게 되었고
삶의 질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였다.
이런 구시대적 환경이 멍거의 자립을 길르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멍거는 켈리포니아 공과대학 재학중
공군에 입대해 2차 세계대전이일어난다.
학업을 접고 전쟁터에 나가야 했다.
그에게 기후 변화의 패턴을 분석하는
기상학자의 임무가 맡겨진다.

부대 배치를 위한 교육 중 물리학을 듣게 되면서
그는 물리학자처럼 사고하는 방식도 배운다.

물리학자들은 펀더멘털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가정에 대해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버핏과 멍거는 사업의 펀더멘털과
논리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46년 하버드 법학대학에 입학했고,
찰리 멍거는 켈리포니아 변호사단에 입회를 허가받아
1962년 동업자들과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설립하게 된다.

찰리 멍거와 워렌버핏과의 만남

버핏과 멍거는 1959년에 오마하에 한 카페에서
주식 시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능력을 알아보고 순식간에 친구가 된다.

1962-1975년까지 멍거는 투자 회사
휠러 멍거 투자조합을 운영하는데
13년간 연평균 19,.8%라는 탁월한 수익율을 올린다.

멍거는 조합에 자산을 운영하는 동안
1972년까지는 시장을 압도하는 실적을 보이기도 했다.

멍거는 1976년 버크셔 해서웨이에 들어가
부회장직을 역임하고 있다.

부동산에서의 첫 백만 달러


파사데나에 있는 스마트 변압기 제조사의
법률 업무를 해주던 중
그 회사의 소유 지분을
그도 가질 수 있음을 멍거는 알게 된다.
멍거는 모아놓은 돈과 빌린 돈까지 그
회사에 투자한다.
하지만 사업 초반에 고전하니 회사의 생존을 위해
멍거가 나서야 했고, 회사 규모를 축소했다.
이렇게 망가진 기업을 사서 고치는 것보다
처음부터 좋은 기업을 사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는 교훈을 얻게 되는 기회였다.

칼텍 부동산 프로젝트에 자문을 하는 동안
찰리 멍거도 자신의 돈을 직접투자해
프로젝트의 반을 소유하게 된다.

그들의 10달러 투자는
400%의 수익을 가져다 주었다.

멍거는 그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그의 친구이자 고객인 사람과 투자 회사를 시작한다.

‘Wheeler, Munger & Co.’메인 사업은
브로커리지와 마켓메이킹이었다.
마켓메이킹은 매수자와 매도자 간의
거래를 위해 시장을 조성하는 일이다.
매수자와 매도가 적으면 상품을
제대로 사고 팔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럼 시장은 비유동적일 수 밖에 없고,
시장 조성자들이 상품 거래에
매수 매도 호가를 제공하여 돈을 벌면
시장은 더 많은 유동성을 공급해 준다.
멍거는 사업에서 나온 이익을 다른 회사에
투자할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를 가지게 된다.
그는 작은 회사를 사들였다

멍거의 전략은 소형 성자 기업에
집중 투자하는 것이었다.
그의 포트폴리오는 스모캡 회사들로 집중되었다.
그로 인해 그의 퍼포먼스는 변동성이
아주 심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대부분 사람들보다
훨씬 좋은 퍼포먼스를 내기 시작한다.

1974년 투자조합이 해산 될 때
그의 연평균 수익률은
24.3%로 5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1962년 멍거가 투자회사를 시작했을 때
그의 친구 워런 버핏이 고군분투하며
운영하는 회사에도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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